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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대철은 록커다. (파운드매거진)
등록일 2016-01-15 04:09
KEEP ROCKING
신대철은 록커다.
Shin, Daechul


1986년에 시나위 1집 로 데뷔해 2014년까지 총 14개의 앨범을 냈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 <탑밴드>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2014년에는 김철영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저서 <뛰는 개가 행복하다>를 출간했다. 같은 해 바른음원협동조합(이하 바음협)을 출범하며 디지털 음원 시장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1986년 탄생한 시나위와 2014년 출범한 바음협은 교집합을 가진다. 모두 시대가 원하는, 혹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허브 역할을 도맡아 수행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나위는 대한민국 메탈 신을 구축한 록의 허브였으며, 바음협은 공정한 음원 유통 구조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시스템적 허브이다.

30년 전 시나위로 한국 록의 허브를 조성했던 신대철은 이제, LP, 카세트테이프, CD, P2P, 그리고 모바일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을 전부 겪은 세대로서 음원 유통 구조의 공정성을 찾고 창작자의 수익을 보장하는 허브 역할을 해내고 있다.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서, 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 신대철은 그동안 음악을 해왔고, 이제는 공정한 유통을 위한 음악 플랫폼을 선보이려 한다. 신대철은 록커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록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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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신대철

시나위는 에디터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나왔다. 시나위를 글로 배운 세대로서, 록의 산 증인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시나위의 중심인물로서 밴드를 결성하게 된 당시 상황, 록커로 살아오며 겪었던 시대의 변화, 그리고 현재의 시나위와 신대철에 대해서다. 바음협 이사장 신대철의 2016년 행보도 궁금했다. 2015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2016년부터 음원 전송사용료를 개선해 창작자의 권익을 확대한다는 언론 보도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개선안의 실효성을 가늠하려면 바음협 측의 입장도 들어봐야 했다.

돈암동 바음협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신대철은 커피부터 내놨다. 사무실은 음악 장비와 악기, 각종 서류와 책으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섭외에 바로 응한 이유를 물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대철은 인터뷰 요청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요즘은 인터뷰는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뿐이었다. 바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상대는 30년간 음악을 해온 록커다. 헤비메탈을 한국에 도입한 1세대 뮤지션이다. 아랫세대는 긴장했다, 신대철은 인터뷰 중간 농담을 던지거나, 슬프지만 웃긴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나위가 데뷔할 땐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세대의 긴장을 풀어줬다. 인터뷰는 그렇게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진행됐다. 윗세대의 연륜과 경험과 지혜가 아랫세대한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 널리 록커를 이롭게 하라

<탑밴드3> 결승에서 바람대로 아시안체어샷이 우승했어요. 그동안 응원 참 많이 하셨죠?
아시안체어샷은 그전엔 몰랐고 프로그램하면서 처음 알게 됐게 됐는데요, ‘뱃노래’를 듣고 나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팬이 됐죠. 

아시안체어샷을 ‘발견’한 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 친구들의 어떤 점이 좋아 보이셨어요?
록 밴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뮤지션이 서양의 그것을 쫓아가잖아요. 사실 저도 그렇구요. 근데 이 친구들 보니까 뭔가 좀 다른 거예요.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질 수도 있는 걸, 안 촌스럽고 너무 멋있게 하더라구요. 그 묘한 포인트를 잘 잡아서 한국적이고도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 낸 걸 보면서 감동받았고 심지어 부럽기까지 했어요.

<탑밴드>가 2011년에 시작해서 시즌 3까지 왔어요.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출연하시게 된 거예요?
당시엔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이었잖아요? 다 가수 중심의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탑밴드> PD가 찾아와서 밴드 오디션을 한다고 하니까 저로선 되게 반가웠어요. 흔히 인디,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는 밴드들은 자신들을 알릴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어디 음악 방송 한 번 나갈 수나 있겠어요? 홍대 클럽에선 유명할지 몰라도,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아무도 몰라요. 얼굴이 알려져야 페스티벌에서도 부르고, 기획사 쪽에서도 연락이 올 텐데 말이에요. 근데 밴드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니까 전 바로 오케이했죠.

또 한 명의 심사위원이었던 윤일상 씨가 “<탑밴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밴드 프로그램”이란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이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밴드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명의 밴드가 주목받을 기회는 <탑밴드>가 거의 유일해요. <탑밴드>가 생기면서 비슷한 여러 시도가 있었긴 하지만, <탑밴드>만큼은 아니었죠.

만일 록이 한국에서 주류 음악이었다면 ‘전 세계에서’라는 수식은 불필요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한국에도 유명한 록 밴드들이 있죠. 있는데 손가락으로 꼽잖아요. 수많은 무명의 밴드들이 자신들을 알리고 싶어도 한국에선 기회가 너무 없어요. 그나마 <탑밴드>가 그런 계기를 만들면서 어떤 창구 역할을 했던 거구요.

<탑밴드> 심사위원으로서 짊어져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요즘에 요리 프로그램이 잘 되잖아요. 셰프들이 나와서 요리를 하고 음식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까 관심이 확 커져서 다른 프로그램도 많이 생겨났구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게 있으면 누군가 나서서 그 가치에 대해서 자꾸 얘길 해 줘야죠. 저는 시청자한테 스피커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밴드를 알게 되고 좋아해 준다면 저로서는 만족해요.

실력이 뛰어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특별히 해줄 말이 없어요. 음악 하다 보면 기회가 생기겠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에요.

(잠시 침묵) 현재로썬 기회가 안 보여요.
만약에 말을 할 거면 차라리 이런 말을 하겠죠. “세상이 잘못돼서 그런 거야. 세상이 잘못돼서 너희가 나갈 무대가 없는 거야!” 아시안체어샷같이 실력 있는 밴드한테는 한국에서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빨리 탈출해서 바다 건너 멀리 가라고 하고 싶어요. 미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차라리 그렇게 나가는 게 그들의 인생에 기회나 전환점을 더 빨리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신대철이 바라보는 한국의 음악계는 어떻습니까?
외형적 성장세는 분명 있죠. 겉으론 탐스럽지만, 안으론 곪아 들어가고 있어요. 한국에서 음악으로 성공하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 두 가지 말곤 없죠. 예전만 해도 음악으로 성공하는 공식이 있었어요. 변진섭이나 조성모 같은 가수는 오디션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 나와서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고, 음반이 많이 팔리면서 성공하게 되는 그런 공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한국에서 음악가들이 성공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오디션이나 기획사가 어렵다면, <무한도전>에라도 나와야죠. 그만큼 답이 없다는 거예요. 전혀 다른 환경이 조성된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요. 아마 내년 초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마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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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순환의 고리, 선순환의 시작

신대철은 한국의 디지털 음원 시장의 유통 구조로는 창작자가 제대로 된 수익을 창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40%에 달하는 유통 수수료, 터무니없이 낮은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가격, 그리고 묶음 혹은 결합상품을 구매했을 때 적용되는 최고 75% 할인율은 음악 콘텐츠의 실 생산자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바음협은 불공정한 음원 유통의 현실을 개선하고 창작자한테 제대로 된 몫을 전달하기 위해 2014년 출범했다. 바음협 이사장 신대철은 현재 음원 유통법 관련 부처들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창작자의 유통수수료를 대폭 낮추고 제대로 된 수익을 보장하는 새로운 유통 플랫폼을 2016년 출시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4년부터 바음협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시죠. 어떤 계기로 협동조합을 만드셨어요?
요즘 협동조합 관련해서 강의를 갈 때 가끔 드는 비유가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람이 버스에 탔다고 가정해요. 자리가 딱 하나 남아서 앉았는데 엉덩이가 뭔가에 찔린 거예요. 알고 보니 의자에 못이 하나 탁 튀어나와 있었던 거죠. 이에 대해 반응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을 겁니다. 먼저 A라는 사람은 너무 열이 받은 나머지 버스 기사한테 항의하고 난리를 쳐요. B라는 사람은 그냥 재수가 없나 보다 하고 마는 유형입니다. 마지막 C라는 사람은 버스 기사한테 망치 없느냐고 물어보고, 구할 수 있다면 구해서 못을 쾅쾅 박아 넣는 사람이구요. 강연에 온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대부분 자긴 A나 B라고 그래요. 저도 얼마 전까진 그랬습니다. 근데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잘못된 걸 아무도 나서서 고치려고 하지 않으니 저라도 나서서 해야만 했어요.

바로 어제(12월 16일) 뉴스를 보니까 내년부터 음원 다운로드 가격을 올려서 창작자한테 그만큼 돌려준다고 하더라구요. 복합 상품 할인율도 낮추고.
그게 지난 일 년 동안 협의했던 내용이에요. 문체부에서 100원 정도 올리겠다고 하는데,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거든요. 그리고 내년부터는 과도한 할인율을 제한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이것도 다운로드에만 적용되는 거고 사용자가 많은 다운로드와 무제한 스트리밍이 결합된 복합 상품에는 여전히 75%의 할인율을 적용해요. 현재 상황과 내년에 바뀐다는 법을 서로 비교해보면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에요.

당사자인 뮤지션들은 이런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뮤지션 대부분이 이런 문제를 잘 몰라요. 다들 시니컬하거나, 너무 나이브(Naive)해요. ‘난 왜 배가 고프지? 돈이 없지?’라고 생각해 볼 법도 한데, 그들은 그냥 하는 거 열심히 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뮤지션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평생 을의 처지로 살아오다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얼마 전에 스트릿건즈 멤버들이 그러더라구요. 앨범내고 차트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건 자기들 음악이 후져서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제가 멤버들한테 그건 세상이 잘못돼서 그런 거라고 말해줬어요.

바음협이 음원 유통법 관련 부처한테 주장한 내용은 뭐였어요?
디지털 음원 복합 상품에 대한 할인율을 폐지하거나 줄이자는 거였어요. 할인율이 75%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거든요. 근데 할인율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없으니 현재로써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요. 법이 바뀌든가, 지금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생기지 않는 한은요.

내년에는 그런 새로운 시스템이 생길 거라는 뉘앙스로 좀 전에 말씀하셨어요. 바음협이 공개할 뭔가가 있군요?
바음협은 전혀 예상 못 했던 걸 출시할 거예요. 외관상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용은 분명 달라질 겁니다. 음악 콘텐츠 면에서 기존의 플랫폼과는 확실한 차별점이 있을 거예요. 애플리케이션 프로토타입은 현재 나온 상태이구요, 지금은 이걸 계속 테스트하고 있어요. 적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시장에 공개하려고 해요.


#시나위의 또 다른 이름, 신대철

자식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신대철은 록의 대부 신중현의 첫째 아들이다. 음악은 어릴 때부터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했으며, 아버지한테 기타를 배우면서 기타리스트로서의 꿈을 키웠다. 장남이라는 위치, 어렸을 때의 집안 환경, 그리고 태생적으로 지녔을 음악적 재능은 몇 년 후 기타리스트 신대철을 탄생시킨다. 스쿨 밴드 센세이션을 시작으로 밴드를 시작한 신대철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았을 무렵 시나위를 결성한다. 1986년, 시나위는 1집 을 발매해 헤비메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급속도로 끌어올리며 데뷔하자마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시나위는 방송의 검열과 규제, 그리고 거대한 팬덤을 동시에 겪는 음악적 교차점 위에 서 있었으며, 한국 메탈 신의 문을 열어젖힌 최초의 록 밴드이기도 했다. 

어렸을 땐 어떤 음악을 들으셨어요?
재즈, 블루스, 록. 음악은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집에 LP가 쌓여있었거든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음악은 이미 끼고 살았죠. 그게 취미였고, 노는 거였으니까.

그 무렵에 기타도 시작하신 거예요?
집에 LP섹션이 있었는데, 거기 꽂혀있는 거 한 장씩 들었어요. 처음부터 차례로 빼서 듣는데, 맨 앞에 꽂혀있었던 게 재즈였어요. 근데 저 끝까지 가니까 완전 다른 게 있더라구요. 흑인 아저씨들이 색소폰 불고 있는 음반만 보다가, 머리가 이렇게 긴 사람들이 기타 치면서 ‘으아아아’ 하고 있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그중에 한 장을 빼 들었는데, 그게 헨드릭스(Hendrix)였어요. 들어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죠. 도대체 이건 뭔가 싶더라구요. 그때부터 ‘난 일단 기타를 배워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마침 그땐 아버지도 밖에서 일을 못 해 집에만 계시던 시기였고.

대한민국 최초 헤비메탈 밴드는 헨드릭스가 탄생시켰군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헨드릭스였어요. 재즈 말고 블루스 말고, 록 레코드판을 처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그게 헨드릭스였다니.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게 가능한가 싶고 그래요.

나머지 두 개는 뭐였어요?
세 번째는 협동조합 만든 거고, 두 번째는 음, 기억이 안 나네요. (웃음)

시나위 1집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나왔어요. 시나위를 글로 배운 세대로서, 그 시작을 직접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누가 이런 음악을 가지고 음반을 내주겠냐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음반사 사장이 우릴 잘 봐줬어요. 근데 헤비메탈 장르를 제대로 프로듀싱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메탈 장르의 불모지였으니까요. 녹음실 관계자들한테 외국 메탈 LP를 돌리면서 참고용으로 들어보시라 하고는 우여곡절 끝에 녹음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퀄리티는 좀 많이 떨어져요. 어쨌든 그렇게 녹음을 하고 시간이 좀 흘렀어요. 어느 날 사장님이 갑자기 전화 와서 “야! 야! 터졌어! 터졌어!” 그러고는 끊는 거예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앨범이 진짜 많이 나갔나보더라구요. 정확히 얼마나 나갔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땐 다 그랬어요. 심지어 계약서도 안 썼다니까요. “야, 돈이 뭐가 중요해? 의리가 중요하지! 필요 없는 건 다 찢어버려!” 이런 분위기였어요. (이후 약 30초간 신대철, 에디터, 그리고 포토 에디터가 박장대소를 했다)

(눈물을 닦으며) 앨범이 그렇게 많이 팔렸는데 돈은 좀 버셨어요?
한 푼도 못 벌었어요. 그때 당시엔 음반사 사장들이 대부분 건달 출신이어서 따지고 어쩌고 할 생각도 못 했어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람들인데 괜히 덤볐다가 두드려 맞으면 어떡해요. (웃음) 나중에 사장님한테 조심스럽게 “우리 음반도 많이 나갔는데 뭐 좀 없을까요?”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없어! 니넨 공연해서 돈 벌면 되잖아.”

시나위의 모든 영광과 환희 뒤에 그런 그림자가 있었군요.
너무 유명해졌는데, 너무 가난한 거예요. 진짜 말도 안 되게 웃긴 상황인 거죠. 하하하.

(웃음) 그럼 영광과 환희의 순간도 말씀해주세요. 돈은 없어도 팬은 무지하게 많았죠? <뛰는 개가 행복하다>에서 아이돌 같은 팬덤을 겪었다고 하신 걸 봤어요.
첫 공연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혹시 사람이 많이 안 올까 봐서요. 근데 공연 시작하고 보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전부 의자 위에 올라가서 막 소리 지르고 뛰고 있는 거예요. 의자 한 줄이 통째로 다 부서질 정도였어요. 한국에서 그런 광경은 처음 봤어요. 첫 공연을 하고 나니까 사람이 안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후에는 공연만 하면 전부 매진되는 분위기였어요.

헤비메탈이 뭔지는 잘 몰라도, 하여간 너무 좋아서 다들 열광했던 거죠?
우리한테 “니네가 하는 음악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근데 우리 음악을 록이라고 하기엔 우리 윗세대들이 생각하는 록이랑은 또 다르잖아요. 우리 음악은 그것보단 좀 센 것 같고. 그래서 콕 집어서 우린 헤비메탈을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음반에도 대문짝만하게 ‘Heavy Metal Sinawe’라고 써있어요.

1986년부터 지금까지 시나위를 지켜온 뮤지션 신대철의 음악적 지향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록을 록답게 하자’였어요. 우리 말고도 록 밴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타협을 조금씩 했잖아요. 한 장르만 본격적으로 파는 밴드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는 꼭 가요로 만들자 이런 게 있었단 말이죠. 시나위는 그런 거 안 했어요. 본토 장르가 추구하는 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시나위는 9.5집까지 나온 상태고, 올해는 앨범 발매 소식이 없었어요. 10집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올해는 내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잘 안 맞았어요. 요즘은 사실 앨범 내는 게 의미가 없어진 시대지만, 저는 이전부터 그렇게 해온 세대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10곡씩 수록한 온전한 형태의 앨범을 내고 싶어요. 근데 이런 문제가 있어요. 제작비를 들여서 투자하면 수익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시장으로는 수익을 기대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다들 앨범을 못 만드는 거예요. 얼마 전에 루시드 폴이 홈쇼핑에서 CD를 팔아서 완판됐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몇 장 팔았는지 아세요? 1,000장이에요. 예전엔 하루에 그만큼 나갔어요. 90년대에 몇백 만 장씩 팔던 가수들 생각해보면 기가 차죠. 그때 전국에 음반 소매상이 몇 개가 있었는지 혹시 아세요?

얼마나 있었어요?
3만 개 정도요. 그땐 초판을 3만 장 찍을까, 6만 장 찍을까 하던 시절이었어요. 만약 3만 장을 찍으면, 1장씩 소매점으로 가는 거겠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일은 절대로 없겠죠. 그래도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우리는 그 비슷한 거라도 해왔지만, 지금 뮤지션들은 그런 기쁨을 못 누릴 거 아니에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C 유형의 인간이 되셨잖아요.
C가 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록커가 가져야 할 애티튜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록커는 그 시대에 필요한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시대정신이죠. 근데 요즘은 시대정신이 담긴 음악을 찾기가 어려워요. 돈이 되는 음악을 하려고만 하죠. 그것에 동의를 못 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청년들을 대변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는 어느 시대건 필요해요.

지금 세상엔 록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거죠?
필요하죠. 록 음악의 본질이 그런 거거든요. 그 시대 젊은이들이 하고 싶지만 못하는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게 록이에요. 존 레논(John Lennon)이 위대한 이유는 시대정신이 담긴 음악을 했기 때문이에요. ‘Imagine’ 같은 음악은 지금까지도 불리잖아요.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구요.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인 척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죠.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볼까요? 김민기 선생이 ‘아침이슬’을 1970년에 발표했는데, 유신 때 그게 금지곡이 됐어요. 유신보다 ‘아침이슬’이 시기 순으론 먼저였는데도 말이죠. 김민기 선생한테 “이건 유신을 비판한 노래 아니냐?” 하면서 막 두들겨 팼대요. 그건 어찌 보면 시대 상황 때문에 얻어걸린 거지만, 시대정신은 그렇게도 담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아침이슬’도 분명 시대정신이 있는 노래죠.

시대정신을 담긴 노래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당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느냐면 그건 물음표예요.
음악이 자꾸 주류에서 밀려나니까요. 예전에는 음악이 젊은이들한테 정말로 소중한 거였는데 지금은 게임보다 더 못한 가치가 되어 버렸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가격이 너무 싸잖아요. 싸니까 가치를 못 느끼는 거예요. 저관여 제품이 되어버린 거죠. A4용지를 하루에 수십, 수백 장씩 쓸 수 있는 건 싸기 때문이잖아요. 음악의 값어치는 이제 그런 것과 비슷해졌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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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 신대철

페이스북을 통해 사회 현실을 비판하시는 논조가 통렬하고도 정교한데요. 그렇게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시는 이유는 뭐예요?
2015년이잖아요. 2015년이니까 해야죠. 자꾸 목소리를 내야만 ‘저 사람은 저런 걸 원하는구나’ 하고 관심을 가지거나 동감하는 사람이 생기겠죠. 그렇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모이게 될 수도 있구요. 그게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거고, 그게 안되더라도 다양한 목소리는 자꾸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진영 논리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민 신대철의 이념 성향은 스스로의 생각과 비교해 어떤 간극이 있나요?
저는 일단 종북이 아니구요.

그런 얘기도 들으셨어요?
좌파가 나쁜 건가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파가 나쁜 게 아니구요. 근데 서로 나쁜 거라고 얘길 해요. 그냥 생각이 다를 뿐인데 말이죠. 100년 전 논리를 가지고 프레임 전쟁을 하는 건 거부하는 입장이에요.

지금 대한민국은 뭐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정책 만드는 사람은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이 낡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임금피크제는 전체 임금을 낮추는 대신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자는 거잖아요? 당연히 비정규직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근데 고용실업률은 낮아지니까 정부 지표로써는 훌륭하고, 기업은 기업대로 고임금자들을 해결할 수 있어요. 그들 입장에선 참 좋겠죠. 요즘은 모든 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자본신앙주의로 가고 있는 느낌이에요. 요즘에 수저론 얘기하잖아요? 이대로 가면 흙 수저들은 더 이상 어떻게 살라는 말이에요?

정책 만드는 사람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대통령이 바뀌어야죠. 그래야 돼요.


#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지난 9월, 한가위를 앞두고 신대철은 페이스북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의 시를 패러디해 쓴 시구를 올렸다. ‘中年近死 願難成(중년근사 원난성), 一寸光陰 不可解(일촌광음 불가해)’라는 문장이었다. 뜻이 궁금해 한문을 보여주며 물었더니 곧바로 답이 들려왔다. ‘나이를 먹으니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는 어렵구나. 이 짧은 시간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고난을 담은 문장이었다.

신대철한테 2015년은 어떤 한 해였어요?
글쎄요. 한 50년 중의 1년이었죠. 음악만 하던 사람이 다른 일도 한다는 것 정도가 있었겠네요.

기타리스트가 이사 직함을 추가로 달았으니까요.
지금도 되게 어색하긴 해요. 작년부터 이쪽 업계에 무슨 일 터지면 항상 저한테 전화가 오더라구요. 그런 일들도 많이 있었고, 또 해철이 관련한 일들도 있었구요. 어쨌든 지금은 조금씩 다른 궤도를 타기 시작하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이젠 모든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사실 숙명, 운명 이런 건 믿지 않아요.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예전이랑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잘 안 믿게 돼요.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이라도 세상을 과학적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더라구요. 경험에 의지했다가 잘못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거든요.

전례가 없는 일을 시도하다 보니 그런 관점이 생기신 거죠?
플랫폼을 론칭했는데 실수가 생기거나 반응이 저조해서 사라진다면 저는 망한 거나 다름없어요. 음악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뭐하고, 다른 새로운 뭔가를 해 보겠다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래서 지금은 극도로 사실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어쨌거나 저는 내년에 플랫폼을 무사히 구축해서 시장에 내놔야 해요. 그게 제일 큰 과제이고, 다른 일들도 너무 많아요.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가 채택됐다. 세상이 온통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전대미문의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 신대철은 혼용무도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대한민국의 음악인이라는 책임감을 짊어진 채 새로운 모험, 혹은 실험에 성공하기 위해 인생의 2막을 쏟아 붓고 있다. 그 중심에는 지난 30년 동안 신대철을 뮤지션으로 살게 만들었던 록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다시, 록커의 목소리가 커질 시기가 왔다. 그 시절 울려 퍼졌던 ‘크게 라디오를 켜고’처럼.


출처 : http://foundmag.co.kr/946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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